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 (문단 편집) ==== 번성 포위와 수엄칠군 ==== [[파일:external/image.aladin.co.kr/pimg_773347113636008.jpg]] >가을 7월,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曹仁)을 도와 관우(關羽)를 공격하게 했다. > >8월, 한수(漢水)가 범람해 우금군에 물이 흘러들어 군이 수몰했다. 관우가 우금을 사로잡고는 이에 조인을 포위했다. 서황(徐晃)에게 조인을 구원하게 했다. >---- >「무제기」 >관우가 번을 공격하고 이때 한수(漢水)가 범람하여 우금 등 7군이 모두 물에 잠기고 우금이 관우에게 항복했다. 조인은 인마(人馬) 수천으로 성을 지켰는데 성에서 물에 잠기지 않고 남은 부분이 수 판(板)[* 성의 높이 2척 = 1판 / 호삼성 주]에 불과했다. > >관우가 배를 타고 성으로 와서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 안팎이 단절되었고 양식이 떨어지려 하고 구원병은 도착하지 않았다. 조인이 장사(將士)들을 격려하고 필사의 각오를 보이자 장사들이 감복하여 모두 하나가 되었다. >---- >「조인전」 >건안 24년(219년), 선주(先主)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관우를 전장군(前將軍), 가절월(假節鉞)로 삼았다. > >이 해, 관우가 군사를 이끌고 번(樊)에서 조인(曹仁)을 공격했다. 조공이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돕게 했다. 가을, 큰 비가 내려 한수(漢水)가 범람하고 우금이 이끌던 7군(七軍)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했고,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德)을 참수했다. 양(梁), 겹(郟), 육혼(陸渾)의 군도(群盜)[* 도적 무리]들이 혹 멀리서 관우의 인호(印號)[* 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고 '''관우의 위세가 화하[* 중국의 별칭]를 진동시켰다(羽威震華夏).''' >---- >「관우전」 >건안 24년(219년), 태조가 장안(長安)에 있을 때 조인으로 하여금 번(樊)에서 관우를 치게 하고 또한 우금을 보내 조인을 돕게 했다. > >가을, 큰 장마비가 내렸다. 한수(漢水)가 범람해 평지에 물이 차올라 수 장(丈)에 이르렀고 우금 등의 칠군(七軍)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이 제장들과 함께 고지에 올라 물을 바라보니 회피할 길이 없었고, 관우가 큰 배를 타고 와서 우금 등을 공격하자 마침내 우금은 투항하고, 오직 방덕(龐德)만이 절의를 굽히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 태조가 이 일을 듣고 오랫동안 애탄(哀歎)해 하며 말했다. > >“내가 우금을 30년 동안 알고 지냈지만 위난에 처하자 오히려 방덕보다 못하리라는 것을 어찌 짐작했겠는가!” >---- >「우금전」 마침내 관우는 그 틈에 형주의 군세를 이끌고 양양, 번성을 차지하기 위해 북진한다. 이에 대해선 무제기에 따르면 조인이 먼저 관우를 치기 위해 번성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조위의 선제공격을 막기 위해 북진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절월 역시 이를 위해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부여한 것이라는 것. 관우가 봉수대를 쌓고 언제든 돌아갈 준비를 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이런 예방전쟁이 확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조인은 이미 봄 정월에 후음을 참하고 번성에 돌아왔고, 관우는 여름/가을에 북진을 했으므로 후음과 연계했다기보단 반란을 틈타 북진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조조는 [[우금]]에게 7군을 주어 조인을 도와 관우를 공격하게 하고(遣于禁助曹仁擊關羽) [[서황]]을 완에 주둔시켰다. >그대로 남쪽으로 진군, 번성에 주둔하고 관우를 토벌했다. 번성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방덕의 형이 한중에 있었으므로 이를 의심하였다. > >''그의 사촌형의 이름을 방유(龐柔)라 하며, 이때 촉에 있었다.'' - 「위략」 > >방덕은 거듭 말하기를 > >"나는 국은을 입은 몸이니, 죽음으로 의를 다하겠소. 내가 직접 나서서 관우를 치고자 생각하고 있소. 올해 안에 내가 관우를 죽이지 못하면, 관우의 손에 죽겠소." > >라 하였다. > >이후 직접 관우와 교전하여 관우를 노리고 화살을 날려 그 이마에 적중시켰다. 그 무렵, 방덕은 항상 백마를 타고 다녔으니, 관우의 군중에서는 그를 백마장군이라 부르며 모두 두려워하였다. 조인은 방덕을 번성에서 북으로 십리 떨어진 곳에 주둔시켰으나, 십여 일 계속된 비에 한수가 범람하여 번성의 평지는 5, 6장 정도 수몰되었으므로 방덕은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제방에 올라 물을 피해다. 관우가 배를 타고 이를 공격해왔는데, 큰 배에서 사방으로부터 제방 위에 화살을 쏘아댔다. 방덕은 갑주를 몸에 두르고 활을 잡고 나섰으니, 쏘는 화살마다 빚나가는 것이 없었다. 장군 동형(董衡), 부곡장 동초(董超) 등이 항복하려 하였으므로, 방덕은 그들을 붙잡아 베어 죽였다. > >일출시부터 전력을 다하여 정오가 지나도록 싸웠으나, 관우의 공격은 점점 격렬해졌다. 방덕이 가진 화살이 다 떨어졌으므로 도검을 쥐고 단병접전을 벌였다. 방덕은 독장 성하(成何)에게 말했다. > >"내가 듣기로, 양장은 죽음을 두려워하여 도망치 않고, 열사는 절개가 꺾이면서까지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이 내 제삿날이니라." > >싸움에 성냄이 더해지고, 기운이 점점 커져갔지만, 물이 높게 차오르니, 관병(吏士) 모두가 항복하였다. > >방덕은 휘하의 장수 한 명, 오백(伍伯오장) 두 명을 거느리고 활을 당기며 작은 배에 올라 조인의 진영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 >물결에 배가 뒤집혀 활과 화살을 잃어 버렸고, 전복한 배에 매달려 물속에 있던 중에 관우의 포로가 되었으나, 당당히 서있었다. > >관우가 말했다. > >"경의 형은 한중에 있소. 나는 경을 장수로 세우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찌 빨리 항복하지 않았소?" > >이에 방덕은 관우를 질책하며 말했다. > >"꼬마야, 어찌 항복 따위를 논하느냐! 위왕께는 정병 백만이 있으며, 위의를 천하에 떨치고 계신다. 네 유비 따위는 범재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대적이나 가능할 줄 아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귀신이 될 생각이니, 적의 장수 따위가 되지는 않을 셈이다." > >결국 관우에게 죽임을 당했다. >---- >「방덕전」 >건안 24년(219),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는데, 이때 각 주에서는 모두 병사를 변방 지역에 주둔시켰다. 온회가 연주자사 배잠(裴潛)에게 말했다. > >“이 시기는 비록 적이 있지만 걱정할 가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것은 남방을 정벌하는 군사에게 변고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강물은 불어나고 조자효(曹子孝 : 조인)는 적지 깊숙이 들어가 고립되어 장래의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우는 효예(驍銳-용맹하고 정예함)하여, 이로운 형세로 진군해오면 장차 근심이 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 >과연 그 다음에 번성에서 일이 생겼다. >---- >「온회전」 >관우가 양양(襄陽)을 포위했을 때, 만총은 정남장군(征南將軍) 조인(曹仁)을 도와 번성(樊城)에 주둔하여 그에게 저항했다. 그러나 좌장군(左將軍) 우금(于禁) 등의 군대는 폭우로 물이 불어나서 관우에게 전멸되었다. 관우는 급히 번성을 공격하였다. 번성은 물에 잠겨 자주 붕괴되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안색을 잃었다. 어떤 사람이 조인에게 말했다. > >"지금의 위험은 우리들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관우의 포위진이 합쳐지지 않는 틈을 타서 가벼운 배를 타고 밤에 달아나십시오. 비록 성을 잃을지라도 생명은 보존할 수 있습니다." > >만총이 말했다. > >"산으로부터 흐르는 물은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관우가 파견한 다른 군대는 이미 겹현(郟: 허창 인근 하남성의 지명) 아래에 주둔해 있으며, 허성(許) 남쪽 지역의 백성들은 불안해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관우가 지금 감히 즉시 진격하지 않는 까닭은 우리 군대가 그들의 뒤를 끊을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만일 도주한다면 홍하(洪河) 이남 지역은 다시는 위나라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대는 잠시 기다려야만 합니다." > >조인이 말했다. > >"알겠소!" > >만총은 백마(白馬)를 물속 깊숙이 잠기게 하여 (제품으로 삼고는) 군사들과 함께 맹세했다. >---- >「만총전」 >다시 서황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치게 하여 완(宛) 에 주둔했다. 때마침 한수(漢水)가 크게 범람하여 우금 등이 물에 잠겼다. 관우가 번(樊)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또한 양양(襄陽)에서 장군 여상(呂常)을 포위했다. >---- >「서황전」 >선제[* [[사마의]]를 말한다.]가 또 이르길, > >"형주자사 호수(胡脩)는 거칠고 난폭하고 남향태수 부방(傅方)은 교만, 사치스러워 둘 다 변경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 >고 했으나 위무제가 이를 살피지 않았다. > >촉장 관우(關羽)가 번(樊)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우금 등 7군이 모두 패몰하자 호수, 부방은 과연 관우에게 항복하니 조인이 포위당한 일이 더욱 위급해졌다. >---- >『진서』 「선제기」 >여몽이 노숙을 대신하게 되어 처음으로 육구에 이르러서, 겉으로는 은혜와 후의를 더욱 닦아 관우와 우호를 맺었다. > >후에 관우가 번(樊)성을 토벌하는데, 병사를 남겨 장차 공안과 남군을 수비하도록 했다. >---- >「여몽전」 자치통감에 따르면 7월에 관우 스스로는 무리를 인솔해 조인을 번에서(於樊) 공격하였고 조인은 좌장군 [[우금]]과 입의장군 [[방덕]] 등에게 번성의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 조인은 방덕에게 장수와 군사를 이끌고 번성 북쪽 10리에 주둔하게 했다.][* 관우가 처음 공격을 시작했을 때 '羽率衆攻曹仁於樊'라고 했는데 이는 자치통감의 기록이다, 관우전 본전에서도 '羽率衆攻曹仁於樊'이라고 동일하게 적고 있다.] 조인이 이렇게 우금과 방덕을 북쪽에 주둔하게 한 것은 조인 역시 자신의 군대가 외떨어진 현군임을 인식하고 번성을 둘러싸고 있는 면수를 통해 관우가 번성을 포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북쪽을 보완한 포진으로 보인다. 성에 남아 있던 [[조인]]이나 [[만총]]이 방덕처럼 따로 성을 나서서 번성 인근 면수 물가를 방어했다는 말은 없으므로 면수를 장악한 관우의 선봉이 도착하면 번에서 공성전을 하게 된다. 즉 자신은 성에 의지해 번에서 공격하는 관우를 상대하고 북쪽은 방덕, 우금에게 맡겨 수비하게 한 것이며 그래서 번을 완전히 포위하려는 관우와 그를 막으려는 방덕의 치열한 교전이 있었던 것이다. 「만총전」을 보면 관우의 본영이자 포위망의 시작은 면수 남쪽인 양양부터였다. 당시의 전투에서 번성에 주둔하던 방덕은 자기가 직접 관우와 싸워 관우를 죽이겠다고 맹세했으며 그 말대로 친히 관우와 백마를 타고 교전해 백마장군이라고 불리며 관우군의 두려움을 샀으며 관우의 이마에 화살을 맞추기도 하는 등 치열하게 싸웠다. 이렇게 번성에서의 싸움이 벌어지기를 한달, 8월 장장 십여일간 계속된 비에 한수가 범람하였으므로 [[방덕]]은 번성에서 북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주둔했는데도 수몰되었고, 우금의 칠군 역시 수엄칠군고지가 방덕보다도 더 번성 북쪽에 있었음에도 마찬가지로 수몰되었다. 수해를 피한 관우는 배에 타서 허우적대거나 제방으로 올라간 위군을 모조리 화살로 쏘아 죽였다. 「우금전」을 보면 우금이 제장들과 함께 고지에 올라 물을 바라보니 회피할 길이 없었다고 하는데 수엄칠군고지 자체는 평지에 가까운데 여기서 북쪽으로 몇km 이동하면 물을 피할수 있는 해발 100m가 넘는 구릉지 언덕이 나온다.[* [[:파일:4wT7dmy.png|자세한 지도1]], [[https://imgur.com/a/9IvWiIu|더 자세한 지도1]]] 양양 남쪽에 보면 현산이라고 고지대가 있는데 관우는 미리 이곳을 선점하고 군사들을 뺐을 가능성이 있다. 아예 처음부터 양양-번성의 고지감제가 가능한 현산에 진을 쳤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관우가 번성에 주둔하고 있던 방덕과 직접 싸우고 있었다가 방덕이 북쪽으로 이동했으므로 관우도 번성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또한 관우와 우금의 차이는, 관우는 양양에서 번성으로 올 때 강을 건너와야 하지만, 우금은 북쪽에서 오기 때문에 배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우금의 경계 부족이라기보단 마침 관우에겐 배가 있었고 우금에겐 없었던 것이 주요 원인일 것이다. 번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물이 갑작스럽게 불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우금은 피하지 못했다. 수해를 피한 관우가 큰 배를 타고 와서 우금 등을 공격하자 마침내 우금은 궁지에 몰려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형주자사 호수와 남향태수 부방도 관우에게 항복하였다. 살아남은 3만 군사도 모조리 포로가 되었다. 여기서 남향군은 본디 형주 남양군의 일부인데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접수하면서 남양의 서쪽을 갈라 새로 만든 군이다. 서쪽으로는 [[무관]], [[상용]]이 있고 동쪽으로는 얼마전 후음이 진압된 [[완]]이 있다. 이 곳의 태수가 투항할 정도로 관우의 위세가 대단했던 것이다. 후일 육손에게 격파된 남향태수로 곽목이 나타는 걸 보면 관우는 따로 남향태수를 임명해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조조 치하 형주는 얼마전에 있던 반란 이후 불안정한 상황에서 남쪽의 관우 말고도 서쪽의 상용에서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셈이다. 괜히 관우가 [[유봉]]과 [[맹달]]에게 번성으로 지원을 오라고 한 것이 아닌 것이다. >24년(219년), 관우(關羽)가 양양(襄陽)에서 조인(曹仁)을 포위하자, 조조(曹公)는 좌장군(左將軍)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구원하도록 했다. 때마침 한수(漢水)가 불었기 때문에 관우는 수군을 이용하여 우금 등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전부 포로로 잡아 강릉(江陵)으로 압송했다. 단지 양양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 >「오주전」 「오주전」에 의하면 관우는 포로를 강릉으로 압송했고 단지 양양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방덕전」에 의하면 관우는 물을 피해 제방에 올라간 방덕을 비롯한 조조군을 사방에서 큰 배로 화살을 쏘아 모조리 쏴 죽이고 일출 때부터 아침을 넘어 정오가 지날때까지 온종일 격렬하게 방덕의 군세와 싸웠고 방덕이 가진 화살이 다 떨어졌으므로 도검을 쥐고 단병접전을 벌였으며 방덕은 항복하려는 [[동형(삼국지)|동형]], [[동초]] 등의 목을 베고 분전했으나 결국 장수 한 명과 오장 두 명을 거느리고 조인에게 돌아갈 목적으로 탄 작은 배가 뒤집혀 그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관우는 방덕의 사촌형이 [[한중]]에 있다며 자신의 장수가 될 것을 정중하게 권유했지만, 방덕은 끝까지 기개를 잃지 않고 투항을 거부하다 처형된다. 한편 이에 맞추어 [[쉬창|허도]] 인근 양(梁)[* 예주 양국이라 보는 의견도 있지만 다른 지역들이 낙양 인근이고 모두 현의 이름인 것으로 보아 멀리 떨어진 예주 양국보다는 하남윤 양현이 더 적합해 보인다.], 겹(郟)[* 영천군 겹현], 육혼(陸渾)[* 홍농군 육혼현]의 군도, 반 조조세력들이 혹은 멀리서 관우의 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다. 특히 육혼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손랑이 관우에게 귀속되어 관우의 관인을 받았으며 관우는 그에게 병사들까지 주어 위와 대적하게 했다. 또 이 틈을 타 조조의 본거지인 [[업성|업]]에선 [[위풍]]이 많은 사람이 연루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가 조비에게 진압되었다. 위풍의 난은 사료가 없어서 어떤 성격의 반란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관우 진격 이후 혼란한 틈을 탄 시도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금석문인 위광해장군여군비(魏橫海將軍呂君碑)에서 이르길 관우가 변방을 흔들며, 유씨의 백성을 공경하였고, 홍수가 퍼지고 넘쳐 번성을 띄우고 가라앉게 해, 평원의 모든 병사는 겉으론 깔보나 몰래 내통했고, 맹장의 날랜 기병들은 물에 빠져 잠기거나 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재앙을 일으켜, 악한 이들이 들끓어, 어떤 이는 성을 유지하며 배반했고, 어떤 이는 무리를 거느리고 깃발을 등에 지며, 스스로 곧 문에 대적했다. 중인(中人) 이하는, 모두 다른 마음이 생겼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관우는 면수 인근에서 [[여상]]이 지키는 양양과 조인, [[만총]]이 지키는 번성을 수륙양면으로 모두 포위하였다. 조엄전에 따르면 조엄이 서황을 따라 번성에 도착한 후, 관우는 조인을 더욱 견고하게 포위했다. 정남장군 조인은 포위당해 인마 수천으로 버티고 있었으며 구원을 보낸 병력은 폭우로 인해 수몰되어 총사령관까지 사로잡혔다. 추가로 관우의 북벌에 호응하는 무리들이 수도인 허도 근방에 산재할 정도로 관우는 화하, 즉 중원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참고로 현대에 와서는 번성(샹양 시)에서 [[허창]](쉬창 시)까지는 중간에 [[완]](난양 시)를 거쳐서 차 타고 3시간 반이면 가는 거리. 그러니까 서울-대구 거리 정도다.][* 그래서 이때의 위업을 가리켜 화하진동(華夏震動)이라 부르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